소금물 주차장
SALT WATER PARKING LOT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바다 한가운데 물놀이를 즐기다 얼음 가득 든 음료를 들이키고, 파라솔 그늘 아래 낮잠 한숨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7월의 해변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보게 될까요? ≪SALT WATER PARKING LOT≫은 양양에 위치한 갯마을해변에서 이틀 간 벌이는 전시·이벤트로, 여름 해변과 해변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의 트렁크 공간을 전시 장소로 삼습니다. 전시 제목처럼 바닷물과 주차장을 둘러싸는 전시, 소금물 머금은 주차장과 여름 해변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작업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전시로 또 여느 피서지 풍경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해질 무렵, 한바탕 물놀이를 마친 뒤 소금기 머금은 온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모래 달라붙은 발도 탈탈 털어냅니다. 해변에서의 시간 이후에 여전히 손마디에 이는 끈적한 감촉, 그을린 피부, 카시트 홈에 박힌 모래 알갱이들, 짭쪼름한 향이 저멀리 바다와 멀어진 후에도 아직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여름 Summer
전시의 주제는 ‘여름 영’이다. 여기에서 ‘영’은 영혼 또는 정신을 뜻하는 ‘spirit’을 가리킨다. 여름 숲에서 열리는 전시는 물리적으로 감지·감각되는 ‘살아 있고 잘 보이는 무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만나도록, 여름의 시간과 숲의 공간에 기대어 그 틈을 더 벌려보기로 한다. 여름 숲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또 거닐어 본 적이 있는가? 여름 숲은 덥고 습하며, 무성하게 자란 잎과 숲에 거하는 수많은 존재들의 소리와 이미지로 가득 들어 차 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몸 가득 땀이 맺힌다. 가뿐하게 걸어지지 않고 축축 처진다. 몸에 열기가 일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여름 기운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진다.
잘 안 보이는 존재를 만나는 데는 상황과 조건의 극적인 변화가 도움이 된다. 열기 가득한 여름 숲에서의 산책이 바로 전시에 드리운 상황과 조건이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을 때, 정신이 몽롱할 때, 자신을 반쯤 내려놓으면 타자와의 만남이 쉬워진다. 자신의 어딘가에 틈이 열리기 때문에 그 통로로 다른 존재들이 틈입하고, 자신도 그 틈을 타고 몸을 한 번 벗어나 본다. 여름에 자주 벌어지는 일들, 여름 특정적 경험들을 한 번 떠올려 보라. 여름 성경학교, 한여름 밤의 꿈, 납량특집… 여름의 계절감과 영적 만남, 환상, 꿈 등이 맞붙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편 전시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해가 저무는 시간을 껴안고, 또 그 시간에 껴안겨서 열린다. 낮과 밤이 손 잡는 시간에, 몸과 영이 딱 붙어 있지 않고 느슨해지는 순간에, 불볕더위에 바람 한 점 불어오는 그 찰나의 시원함 속에서, 극과 극이 만나며 어딘가로 후루룩 빨려 든다. 당신을 겁주고 오싹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그저 만남의 자리를 넓혀보는 것. 그 만남을 잇는 또 하나의 고리이자 통로로 여름 숲 한가운데서 세 작가의 작업이 보이고 또 들린다.
김목인은 전시가 열리는 장소까지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오는 동안 들을 수 있는 사운드 작업을 선보인다. 김목인은 즉흥 연주 위에 자신이 써 내려간 이야기를 낭독한다. 이야기는 숲을 걷는 현재의 우리와 이 숲을 걸었을 옛날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심지어는 신화 속 인물의 걸음과 그 경험으로도 가닿아 본다. 무니페리는 영상 작업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주소서>를 상영한다. 비거니즘(veganism)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이 작업에서 무니페리가 말하는 ‘타자’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인 상태, 나를 나로서 온전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타자의 범위는 나와 다른 인간 존재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작업에 등장하는 돼지, 양 같은 동물 존재를 포함한다. 작업은 ‘다른 종과 함께 살기’에 관한 사유를 촉발하는 동시에, 함께하는 이 과정이 결코 깔끔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일은 아님을 암시한다. 임창곤은 신체를 그리고 조각한 작업들을 선보인다. 각 작업에서 신체는 몸 전체가 아닌 몸의 일부로 등장한다. 여러 개의 판넬에 한 남성의 신체를 구겨 넣듯 그린 <비어있는 신체>는 이번 전시에 판넬들을 분리시키며, 한 몸(<비어있는 신체>)에서 나뉜 몸(<비어있는 발>, <비어있는 얼굴> 등)이 되어 숲 군데군데 놓인다. 나무에 걸린 <결정체>와 <누군가의 왼팔>은 신체 부위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조각과 그 조각이 떨어져 나온 신체 일부이다. 연장선에서 신체의 형상을 추상화시키며, 근육과 그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 작업 <누군가의 결, 흐르는 조각들>은 합판에 고정된 조각과 합판 밖에 놓인 조각으로 구성된다. 작업은 숲의 틈새 공간에 설치되며, 마치 합판 안 근육 조각이 합판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완전)한 몸이 아닌 분리된 몸들의 배치는 인간에 머물지 않는 다른 존재들의 형상까지 그려보게끔 하며 존재의 틈새 되기를 자처한다.
숲에는 ‘생명의 수많은 형식이 넘실’[1]댄다. 복작거리고 우글거리면서 오고 가기를, 먹고 먹히기를, 죽고 살기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숲에 거하는 종들의 현재는 각자가 속한 종의 과거와 미래를 감싸고 있다. 또, 숲을 구성하는 종들 서로는 서로에게 얽혀 존재하기에, 숲속 관계망은 보다 다층적으로 짜여진다. 그렇기에 숲은 어느 때나 다른 존재를 만나기에 충분한 상황과 조건 속에 있기도 하다. 여름 숲을 걷다가 주위에 어른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놀라지 않기를, 더불어 있음을 한 번 느껴보기를. 그 어른거림은 살아 있는 관계의 증거이자, 살아 있는 관계를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기에.[2]
각주
[1]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영(역), 사월의책, 2018, p.43.
[2] 마지막 문장은 티머시 모턴의 저서 『인류』에서 ‘연대를 느낀다는 것은 곧 어른거림을 느낀다는 것’이라는 단락에서부터 연상했다.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봄 Spring
가이아의 향기나는 주스
땅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를 향하여 온갖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향을 풍기며 살아나는 움직임. 건조한 가지와 마른 잎에 빛이 깃들고, 온기를 머금은 새잎이 돋아난다. 아주 멋진 흐름, 그리고 순환. 잠든 생명을 깨우는 시간, 잠에서 깬 생명들이 파생시키는 제각각의 움직임. 그리고 봄에 이는 꽃 향기의 이유. 날개달린 자들을 꽃 자신에게로 불러들이기, 초대 그리고 매혹. 이어서 초대받은 자들의 응대, 기꺼이 매혹되기, 부름받은 곳에서 누리기. 어떤 이미지, 움직임, 냄새, 소리를 상상해 보기. 즐거이 분주한 날갯짓, 꽃들 사이로 윙윙거리는 꽃가루 매개자들, 그리고 해마다 그들이 즐기는 달콤한 꽃꿀 주스, 덩달아 신나서 지저귀는 소리들. 그 모든 시간을 누리다 몸에 잔뜩 달라붙은 꽃가루, 이어지는 동작은 그 후 벌어질 또 다른 움직임과 탄생의 예비된 시간을 가득 머금은 채. 스스로가 하는 일을 반쯤 알고 또 반쯤 모른 채, 타고난 대로,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신이 속한 계보를 따라 그렇게 움직이기.
당신은 가이아가 누구라 생각해, 무엇이라 생각해? 자연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 기다란 곱슬머리에 풍만한 가슴을 지닌, 그 뱃속에는 지구를 가득 품고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신비로운 한 여성의 이미지, 미화된 가이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그녀를 오해한 거라면? 언제까지나 온화할 거라는 착각, 아낌없이 또 대가 없이 모든 걸 내어줄 거라는 오산. 어쩌면 가이아와 그녀의 땅이 이미 내린 결정, 거두어들이기. 봄의 풍경을 가득 메우는 윙윙거리는 존재자들이 반쯤 홱 사라진다면, 연이어 그 존재자가 매개하는 꽃들 다수가 수분에 실패해 열매 맺지 못한다면, 따라서 수확 가능한 식량이 필요에 턱없이 부족하다면? 가정형으로 전제한 ‘~다면’이 이미 우리 눈앞에 도래해 있다면. 가이아/대지에서 파생된 생명들이 풍기는 내음은 여전히 당신에게 향기로워? 그 생명들 속에 응축된 향기나는 주스 한 모금을 들이켜 마셨을 때 그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달콤한 맛이야? 혹시 그 향기로운 주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잔의 주스는 아니야?
(*기획의 글 제목인 ‘가이아의 향기나는 주스’는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저서 『사이클로노피디아』의 한 단락에서 따왔다.)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겨울 Winter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 겨울 Winter≫의 주제는 ‘겨울나기wintering’이다. 겨울 추위에 대비해 우리가 옷가지를 교체하고 생활 공간의 문틈이나 벽, 수도 등을 정비하듯, 숲 또한 타고난 역량과 지혜로 적당한 때가 되면 몸의 일부를 비우고 또 채우기 시작한다. 전시는 인간과 숲 서로가 겨울을 나는 모습을 마주하는 동시에 일종의 접촉을 동반한다. 얼어붙은 창틀에 붙은 에어캡, 언 발을 감싸는 수면양말, 수도를 덮는 은박 보온재, 겨울 나무를 감싸 엮은 짚처럼 ‘겨울나기’는 혹한의 추위가 이어지는 시간 사이사이를 부드럽고 따뜻한 접촉들로 둘러낸다. 겨울은 홑겹으로, 홀로 잘 날 수 없다. 복수의 감쌈, 감싸임이 겨울을 잘 나게끔 돕는다.
이번 전시에서 강수민은 ‘부피로서의 회화, 피부로서의 조각’을 선보인다. 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려 있는 겨울철 산 속 동물처럼 털로 무장한 채 놓여 있는 회화, 바닥에 세운 스키폴대의 지지를 받으며 놓인 회화 등에 사용된 재료들은 겨울의 질감을 반영하는 동시에 겨울 산속 한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놓인 작업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염두에 둔다. 일련의 작업은 재료 간의 접촉, 작품 표면과 숲속 구성체 간의 접촉을 동반한 유기적 관계 맺음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원정인은 자연에서 가져온 형태에 인공의 소재를 결합한 도자 작업을 선보인다. 나무 틈에 난 버섯들, 새알의 껍데기, 카라꽃, 눈 결정체 등의 형상은 흙으로 빚어, 굳히고, 칠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자연 속에 놓인다. 인공의 물질들이 압도하는 도심 속 일상 풍경과 달리 숲에서는 자연물과 인공물의 비중이 반전된다. 겨울 숲에 놓인 인공의 작업들은 자연 풍경에 기대어 작은 부분을 이루며, 기존의 감각을 재고해 보게끔 한다. 쿠카카와이는 숲에서 잠시 쉬어 가도록 만든 벤치 위로 뜨개질해 만든 색색의 벤치 쿠션을 두고, 크고 작은 나무들을 니트 스카프(scarf tree)로 두른다. 벤치 쿠션은 포근한 매개체가 되어 숲과 관객 사이를 자연스레 잇는다. 숲속을 거닐다 벤치 쿠션에 기대 누운 관객은 하늘과 햇빛, 나무들이 엉켜 만들어낸 근사한 패턴을 바라보는 동안 어쩌면 추위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는 2월의 겨울 숲 풍경 안에 하루 동안 파고든다. 전시는 겨울 추위 속 매개되는 만남, 기댐, 감싸 안음, 포옹 등을 은유하는 작업들과 더불어 숲속을 거닐고, 머무는 관객들의 걸음과 눈길 사이에서 펼쳐진다. 한겨울 색색의 실로 촘촘히 짜인 목도리를 두를 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각이 몸과 마음 한편에 이는 것처럼, 전시로 엮어 두른 이 터치에 겨울 숲도 흔쾌히 응해주지 않을까? 이 시간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온기를 더할까, 무엇이 무엇의 감촉을 느끼게 될까?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가을 Fall
《살아 있는 관계》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펼쳐진다. 전시는 1년을 주기로 4번, 사계절의 흐름을 따라 벌어진다. 전시의 시작을 맞는 계절은 ‘가을’이며, 작가와 관람객이 전시 장소로 마주하는 곳은 숲이다. 작가가 작업을 설치하기 위해,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흙을 밟아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스레 숲속의 잎사귀들과 몸을 스치게 되고, 날고 기는 곤충들의 움직임과 그들이 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전시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관계’ 속으로 작가와 관객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이끈다.
WTM decoration & boma x Boma는 오늘, 지금의 재료, 색, 느낌 그 자체를 제시하는 작업들을 선보인다. 점토 조각, 페인팅, 종이 세움, 종이 구김, 리본 걸기 등으로 구성된 이번 작업은 완성된 형태나 목적에 집중하기보다, ‘WTM decoration & boma’의 정체성으로 실험하고 싶었던 재료, 기본적인 도구와의 물질적 첫 대면을 구체적으로 서술·나열·묘사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일련의 작업은 힘을 들이지 않은 조형 언어의 탐구이자 조형 언어와의 만남 그 자체로, 자연 공간은 이 실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소가 된다. 정하슬린은 전시 장소를 답사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작업의 일부로 가져온다. 나무의 질감, 나뭇잎의 그림자, 버섯 곰팡이, 숲에 이는 바람 등은 작업 과정의 일부가 되어, 작품 속 레이어와 형상으로, 설치의 요소로 재등장한다. 숲의 요소들과 관계 맺는 정하슬린의 이번 작업은 그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회화 주제인 ‘과정이자 결과로서의 레이어’, ‘구조를 드러내는 내용’과도 맞물려 해석 가능하다.
작품은 단 하루 동안, 한시적으로 설치된다. 작품은 숲이 형성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그곳에 잠깐 기대어 있다. 나무를 해치거나, 숲속 생명의 자리를 빼앗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곳을 점령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작가와 작품은 숲 사이에 찰나로 머문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아름다운 제스처와 형태들로 채워진다. 숲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발걸음과 손짓, 눈길은 살아 있다. 맞은편의 숲 역시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동시에 느낀다.
숲을 걷는 행위는 균류의 생성을 돕고, 균류는 숲의 소화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우리는 숲속을 산책하는 것만으로 숲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맞은편의 우리는 말할 것 없이, 숲을 거니는 동안 그 이상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돌봄과 보탬, 전시는 앞선 태도를 지향하며 나아간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돕나, 누가 누구에게 보태나?” 이 질문을 수차례 곱씹어야 할 것이다. 결코 한쪽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아름다운 흐름을 향하여.
장식전
An Exhibition of Decoration
장식은 부정적이거나 낮은 지위 하에 속하며 충분히 주목받거나 해석되지 못했다. 장식은 부차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늘 다른 장르 속에 기생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장식은 건축·공예·디자인·미술 영역 어디에서나 등장할 수 있고 그 출현이 어색하지 않지만, 으레 독립적으로 설 수 없다고 여겨진다. 장식은 독립적인 학문과 연구 대상에서 쉽게 배제된다. 장식사학과, 장식 비평가, 장식 평론 등 장식과 학문적 단어의 결합은 어색하게 느껴지고 이 영역은 거의 부재한다. 왜, 혹은 언제부터 장식은 소외된 영역 전반을 떠맡게 되었을까? 장식은 모든 곳에 거하면서도 왜 모든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을까? 어째서 장식은 ‘범죄’라는 단어로까지 비유되며(1908년에 쓰여진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저서 「장식과 범죄Ornament and Crime」) 끝없이 하락해야 했을까? ᅠ한편으로 장식의 배제는 앞선 이유로 인해 오히려 다양한 하위의/열등한/부정된 존재들과 손을 맞잡아 왔다. 성·정체성·인종·지역의 주제와 관련하여 여성주의Feminism, 퀴어이론Queer Theory,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지역주의Regionalism 등을 발언하는 주체들은 스스로를 표현할 때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와 무관하게 장식을 언어로 사용하곤 했다. 사실 장식은 그 어떤 장르보다 풍성하다. 장식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몸체로 변형 가능한 속성을 지닌다. ‘장식’, ’장식적’, ‘장식스러운’, ‘장식하다’와 같이 장식은 모든 품사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장식전》은 과도하거나 부차적인, 불필요한 영역으로 특정 장르에 종속된 위치를 점유해 온 장식을 다른 어떤 장르에 기대지 않는 독립된 지위로 세우는 시도로써의 기획이다. 《장식전》은 전통적 의미의 장식 안에 포섭되지 않는 동시대 미술/장식 사례들을 감지하며, 이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물음을 던져 본다. 《장식전》은 미술과 장식의 위상에 대해 다시금 질문하며, 미술 아래 속한 하위 장르인 ‘장식 미술decorative arts’로 불리거나, 작품 주변을 꾸미는 액자나 좌대, 설치 일부 등 부수적으로 기능하는 ‘미술 장식art decoration’이 아닌, 미술과 동등한 지위에서 빗금 표시를 덧붙여 존재하는 ‘미술/장식’이라는 독립된 영역의 장식을 생각해 본다. 장식은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으로 가능할까?
《장식전》에서 5인의 미술가 김수연, 김혜원, 박보마, 소민경, 이유성은 '장식가'로 초대받는다. 본 전시의 기획자는 ‘장식 큐레이터’가 되어 전시를 꾸리고, 기존의 미술 비평가는 '장식 비평가'가 되어 장식 전시에 대한 글을 쓰며, 관람객은 전시공간에서 '장식'을 관람하게 된다. 《장식전》에 초대된 5인의 장식가는 각각 ‘오래된 집’의 실내외 공간을 도맡아 꾸민다. 실내 장식을 맡은 장식가는 공간의 벽 장식, 바닥 장식, 기둥 장식, 통로 장식 등을, 실외 장식을 맡은 장식가는 문 장식, 정원 장식 등을 진행한다. 더불어 장식가들은 미술가로서 제작한 각자의 이전 작품을 장식의 일부로 가져온다. 장식가로 초청된 미술가, 장식으로 소환된 작품, 장식 비평으로 불리게 된 미술 비평, 미술 큐레이터가 아닌 장식 큐레이터 등, 미술에서 장식으로의 용어 치환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 전시의 목적을 장식의 부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미술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관람객의 해석은 자유롭지만, 한 가지 주의할 바는 본 전시가 지난 세기의 장식 미술을 재발견하거나 재배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식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끝으로, 《장식전》은 이와 같은 전시 방식을 경유해 다음의 질문을 던져 본다. 어떤 미술 전시나 작품을 보며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곧잘 쓰이던 ‘장식적’이라는 표현은 본 《장식전》과 공간 내외부에 놓인 일련의 장식들 앞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될까? 혹 누군가는 이 장식들을 얼마나 '미술적'이라 말하게 될까?
전시명: 장식전
기획: 이상엽
참여 장식가: 김수연, 김혜원, fldjf studio as boma, 소민경, 이유성
전시기간: 2020.10.19 (월) - 2020.11.13 (금)
관람시간: 10:00 - 18:00, 일요일 휴무
장소: 오래된 집 (서울 성북구 성북로18길 16)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포스터 디자인: 워크스
Title: An Exhibition of Decoration
Curated by Sangyeop Rhii
Decorator: Suyeon Kim, Hyewon Kim, fldjf studio as boma, Minkyung So, Eusung Lee
Dates: 19th October, 2020 - 13th November, 2020
Hours: 10am - 6pm, Closed on every Sunday
Venue: Old House (16, Seongbuk-ro 28-gil, Seongbuk-gu, Seoul, Republic of Korea)
Supported by Arts Council Korea
Graphic Design by WORKS
땀이 잔치
A Sweaty Feast
강수민의 개인전 《땀이 잔치》는 밖으로 나와 몇 걸음만 디뎌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한여름에 열린다. 전시 제목의 일부로 사용된 단어 ‘땀’은 전시가 열리는 무더운 팔월의 계절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다각도로 해석 가능하다. 먼저 땀은 본 전시에 포함된 회화 작품들의 표면 위에 바른 실리콘·레진·아크릴·에폭시·플라스터 등의 재료가 감각되는 특성을 일괄 일컫는다. 또한 눈으로 관찰되는 시각적 속성으로써 땀방울과 피부에 맺히는 땀의 촉각적 성질처럼, 땀이 갖는 다중 감각은 회화와 조각의 두 매체를 함께 다루는 강수민의 작업과 그가 두 매체를 다룰 때 시각과 촉각을 교차하거나 동시적으로 사용하는 작업 방식[1]을 비유한다. 마지막으로 땀은 전시 준비 기간 동안 무형의 수고와 노력을 가시화하는 장치로 사용되며, 제목처럼 전시는 땀이 잔치다.
복수종 회화: ‘THE WET WANDERER’ 연작
강수민의 회화 연작 ‘THE WET WANDERER’에서 눈에 띄게 감지되는 덩어리진 물성은 여름철 더위에 땀을 잔뜩 머금은 누군가가 뙤약볕을 피해 이동한 대피소에 늘어져 땀을 식히는 모습을, 또는 급작스레 닥친 여름 장마에 흠뻑 젖은 한 존재가 비를 피해 급히 들어선 피난처에서 몸에 밴 빗방울을 뚝뚝 떨어트려 남긴 흔적을 연상시킨다. 시각과 촉각이 결합된 이중 감각으로 여름이면 유난히 부각되는 땀방울과 빗방울이 지닌 형질과 ‘THE WET WANDERER’ 연작의 축축한 표면이 갖는 유사성 너머, 강수민은 본 회화 연작 위로 부피감을 지니며 달라붙은 형체들(유화 물감·실리콘·레진·목탄·아크릴·에폭시·플라스터 등의 재료를 섞고 겹치며 구현한 점성을 지닌 물질)을 일종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회화 속에 고인 형태들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는 작가의 태도와 그 태도를 반영하듯 의인화하여 붙인 ‘젖은 방랑자' 쯤으로 번역 가능한 제목 ‘THE WET WANDERER’는 강수민이 상상을 가미해 구상한 비유적 개념에 가까우나, 어쩌면 이 사유는 비유에 그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미생물이 그림 안에 거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일련의 회화는 여타의 생명체가 가진 특성과 다를 바 없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화와 부식을 동반하며 그 외피는 변형될 예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욱이 강수민은 차차 노화의 수순을 밟게 될 회화의 운명을 순응하는 한 방식으로서 <THE WET WANDERER-2>(2020)를 제작한다. 본 작업은 균열이 쉽게 가는 재료인 에폭시를 빈 캔버스에 부어내고 덜 마른 유화 물감 위에 실리콘을 덧대는 과정을 거치는데, 사실상 앞선 방식은 그림의 보존도를 급속도로 낮추기 때문에 잘 선호되지 않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강수민은 이같은 재료의 혼용과 순서의 재배치를 통해 회화가 이미 배태한 노화의 순간을 조금 앞당겨 마주해 본다.
한편 ‘THE WET WANDERER’ 연작에서 다종다양한 물성들이 캔버스 안에 서로 맞붙은 채 흡수·접촉·결합·공생하여 축축한 몸체를 일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외피가 변형을 거듭하는 모습은 이들을 ‘복수종 회화(plural species painting)’로 이름붙여 바라보도록 한다. ‘복수종 회화’는 실리콘·레진·목탄·아크릴·에폭시·플라스터 등의 물질을 재료 이상의 서로 다른 특질을 지닌 복수종으로 인지하고, 이들을 회화 환경을 조성하는 유기체로 바라봄을 전제한다. 이에 따라 작가 또는 관람객을 ‘하기’의 주체로, 작품을 ‘되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는 서로의 위치를 바꿔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복수종 회화는 우리가 그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에 선 우리를 감지하며, 방문객이 없는 시간 동안은 앞서 만난 관람객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곧 만날 관람객을 기다리기도 한다. 사실 본 문단의 도입에서 ‘THE WET WANDERER’ 회화 표면을 은유하며 언급한 ‘누군가’와 ‘한 존재’는 인간 존재 뿐만 아니라, 인간 외의 다른 종이 땀을 식히고 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까지도 모두어 가리킨다.
A Sweaty Freedom
본 전시에 포함된 작품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Show me the way 1152>(2020) 조각은 위를 향해 쭉 뻗은 모양새로 인해 ‘수직적 모양’ 하면 으레 연상되곤 하는 남성성을 상징하는가 싶지만, 이 쉬운 연결고리를 조금만 더 비껴서 <Show me the way 1152>를 바라보면 그 외형은 오히려 여자화장실을 상징하는 여성 기호와 그 생김새가 더 유사하지 않은지 반문하게 된다. 한편 <체리나무> 표면 위로 일정한 방향을 그리며 부착된 다량의 체리 모형 오브제는 마치 살갗 위에 촘촘히 달라붙은 체모가 자연스레 형성한 일방향의 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매체와 내용 상 <Show me the way 1152>와 유사한 결을 가진 <1% Tickling>(2020)는 여러 군데 작은 홈이 파인 흙덩이 위로 가느다란 철사가 몇 가닥 꽂힌 모습으로 구현되었는데, 이 구조물의 생김새 또한 신체 일부에 듬성듬성 난 털을 떠올리게끔 한다. 신체와 체모를 연상시키는 앞의 두 작업 요소들은 비단 이번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이전 작업에서부터 강수민이 관심을 기울이며 탐구해 온 주제이다. 신체와 체모를 향한 그의 관심은 살아가는 동안 달리 떼어낼 수 없이 자신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물질인 몸과 털에 대한 사유이자,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체내외 경험을 통해 축적한 감각을 신체와 한두 발짝 분리시켜 재감각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실상 신체와 체모가 엮여 발생하는 감각은 강수민을 비롯한 개개인이 가진 고유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털과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공통 감각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끈끈이처럼 목뒤로 달라붙는 머리카락처럼, 성기게 분무기를 뿌린 듯 땀에 젖은 피부에 닿아 스민 셔츠 위 땀자국처럼.
온몸이 끈적거리고, 늘어지며, 찌는 듯한 기분을 번번이 느끼는 여름철이지만, 그 연장선에서 전시 제목 또한 《땀이 잔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 강수민과 기획자 이상엽은 무엇보다 ‘자유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서로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전시가 무엇일지 여러 텍스트와 메모, 노래와 이미지를 공유하며 함께 그 길을 더듬어가는 중에, 강수민은 다음의 작업 메모를 전달해 주었다. “지켜야 할 벽이 무너지는 순간에 모든 곳이 길로 변하는 그 자유로움을 그림에서도 느낄 수 있다면.” 가령 이 자유로움에는 매체를 다루는 태도의, 재료의, 형태의, 순서의, 완결성의 부분들이 포함되지만, 더 나아가 매해 여름마다 신체 각 부위에 타고난 체모를 다듬고 떼어내고 자연스레 흐르는 땀을 억제시키고 유예시키는 데서 오는 피로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까지 가닿는다. 후덥지근한 여름을 가로질러 전시장으로 걸음해 준 이들이 ‘땀이 잔치’인 이곳에서 잠시간 자유의 순간을 누릴 수 있었으면.
땀이 잔치 A Sweaty Feast
강수민 Soomin Kang
⠀
기획/글: 이상엽
전시기간: 2020. 8. 13 — 8. 30
관람시간: 목요일 — 일요일 13:00 ~ 19:00
장소: OS(용산구 소월로 64-4, B1&3F)
텍스트: 밀푀유타임라인
포스터 디자인: 정하슬린
⠀
Curated by Sangyeop Rhii
Date: 13 — 30 August 2020
Hours: Thur — Sun 1pm ~ 7pm
Venue: OS(B1&3F, 64-4, Sowol-ro Yongsan-gu, Seoul, R.Korea)
Text: Mille Feuille timeline
Poster design: Haseullin J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