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칼레로(Sol Calero)[1]의 개인전 《Tente en el aire》(Kunsthalle Lissabon, 2018)에서 액자는 그림을 앞지른다. 부등호로 표시해 본다면 아마 액자 > 그림, 100번 양보 한들 액자 ≧ 그림 정도로 표시될 뿐 앞선 부등호 방향을 반대로 꺾기는 힘들어 보인다. 액자가 그림을 앞지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사용된 작품 두 점 <Tente en el aire I>(2018)과 <Tente en el aire II>(2018)를 바라보면 곧바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두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혹은 먼저 보이는 것은 액자틀 속 그림이 아닌 액자 그 자체다. 보통 액자의 역할이 그림을 보호하고 지지하며 때로는 그림을 돋보이게 하거나 그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용도로써 장식에 그치기 마련인데, 두 작품에서의 액자는 그림보다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프레임을 넘어서까지 휙휙 휘갈긴 붓질의 <Tente en el aire I>과, 아직 그림을 넣기 전 마치 액자 뒷면에 딸린 판자처럼 보이는 회갈색 물감으로 덮인 <Tente en el aire II>. 우리는 여기서 중심과 주변을 굳이 구분해 보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줄곧 당연시되어 온 것처럼 그림을 ‘중심’에, 액자는 ‘주변’으로 망설임없이 분리시킬 수 있을까? 그 선택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을까? 《Tente en el aire》에 속한 다른 작품을 추가적으로 살펴보면, 그림과 액자 사이 놓인 위계의 모호함은 전시장의 벽면으로까지 확장된다. 전시공간의 한쪽 벽면은 그림과 벽의 별다른 구분 없이 전체 벽이 물감으로 뒤덮이고 그 와중에 벽면 한가운데 놓인 액자들은 주인공 마냥 반짝 빛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또 한번 그림~액자~벽 사이에 부등호를 표시하게끔 혹은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게끔 요청받으며 전에 없던 난감한 고민에 빠져든다.
1) Sol Calero, <Tente en el aire I>, 2018
2) Sol Calero, <Tente en el aire II>, 2018
칼레로의 전시 《Tente en el aire》에서 한눈에 파악하기 힘든 가시적 표면 아래를 파고 들어가 보면 휘황찬란한 액자의 출처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전시된 액자들은 익명의 페루 장인들이 제작한 목재 액자틀로 칼레로는 이를 페루 여행중 기념품으로 획득했다. 화려한 액자들은 모두 ‘쿠스코 스쿨(The Cusco School / The Escuela Cuzqueena)’에서 제작한 성상화를 걸기 위해 만들어졌다. 쿠스코 스쿨은 16-18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페루의 쿠스코 지역에 생겨난 로마 가톨릭 예술 전통으로, 유럽의 예술 기법을 적용한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시행해 수많은 그림을 탄생시켰다. 쿠스코 지역의 토착민들 손에서 그려지고 뿌리내린 지배자들의 전통 깃든 성상화는 실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이 두 요소가 한데 엮여 탄생한 혼종적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선 환경 가운데 귀속되어 성상화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액자 일부는 칼레로의 손에 ‘기념품’의 이름으로 붙들려 나와 현대미술 전시장 안에 놓이며 시대와 맥락을 벗어난 채 성상화 없이 단독으로 주목받는다.
그렇다면 별다른 형체 없이 색면으로만 구성된 그림들은 《Tente en el aire》 전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가장 앞서 보이는 전시 제목이 그 단서이다. 스페인어 ‘Tente en el aire’는 공중에 몸을 두다(Hold yourself in air)라는 의미를 지닌 동시에 캄부조[2](cambujo)와 인도(indio) 혼혈 인종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인종 분류법 용어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페루의 쿠스코 스쿨에서는 성상화 외에도 당시 스페인의 정치적 목적 하에 생성된 인종 분류법을 회화로 옮겨 그리기도 했다. 이때 그려진 인종 분류법 그림은 당시 페루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스페인이 인종 혼합의 빠른 증가 추세를 감지하며 이를 구분하고 또 다시 계층화하기 위해 구축한 것이었다. 솔 칼레로는 이 인종 분류법을 설명하는 일련의 그림을 문제적으로 바라보며 당시 분류법에 따라 묘사된 인물들의 피부색만을 추출해 색면 구성으로 전시에 가져 온다. 가령 <Coyote>(2018)는 ‘인디언(indio)’과 에스파냐계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 인종인 ‘메스티조(mestizo)’와의 결합으로 이름 붙여진 ‘코요테(coyote)’를 뜻하며, 사용된 물감의 조합 또한 그림 속 인물들의 피부색을 추출해 배치한 것이다. 가장 희고 순수한 스페인 혈통이 꼭대기에 속한다면 결합된 인종 사이의 피부색이 짙으면 질을수록 점차 아래 계급에 위치되며, 앞선 피부색에 따른 분류로 사람들의 계급이 손쉽게도 매겨지곤 했다.
인종의 위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술에서도 쉽사리 허물 수 없는 위계가 있다. 이 위계 안에서 장식은 곧잘 과도하고 불필요하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주 쉽게 낮은 곳으로 거처를 지정당하고 순수하지 않다고, 고결하지 못하다며, 하찮고 세속적이라며 비난받는다. 그런데 꽤 흥미로운 일은 장식에 덧붙은 앞선 수많은 부정적 의미들을 이유로 가지각색의 부정당한 존재들 곁에 장식이 함께해 왔다는 것이다. 《Tente en el aire》 전시에 펼쳐진 진흙탕 같은 물감들 사이로, 진흙탕처럼 얽힌 남미의 혼종 문화들 사이에서 그림이 아닌 액자가 솟아 오른다. 솔 칼레로는 곧잘 그가 구성하는 화면 안에서 예상 바깥의 위치에 강조점을 둔다. 칼레로는 전시장 곳곳에 와글거리는 색채를 쏟아내며 어디에나 강조점을 두고 혹은 어떤 곳에도 강조점을 두지 않는 듯 보이며, 앞선 방식이 아니라면 모든 부차적이고 부수적이라 상정된 곳에 강조점을 두곤 한다. 《Tente en el aire》에서의 액자가 그러한 것처럼. 어쩌면 오래도록 우위를 점한 그림을 침수시키고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외면받은 장식으로서 액자를 부상시키는 이 시도를 통해 ‘지배와 종속’, ‘중심과 주변’으로 계층화되어 깊게 뿌리박힌 두 관계에 수평축을 맞출 수 있지는 않을까?
3) Sol Calero, <Coyote>, 2018
4) Sol Calero, 《Tente en el aire》, 2018, exhibition view, Kunsthalle Lissabon, Lis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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