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래 1. 페넬로페 이야기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 전쟁에 나간 남편을 20년 동안 기다리는 인물이다. 긴 기다림 속에서 페넬로페가 한 일은 계속해서 베를 짜고 푸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수의를 짠다는 명목으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 자리를 치지하려는 온갖 남성들의 구혼을 거부하고 또 유예시킨다. 낮에는 베를 짜고, 밤이 되면 낮에 짠 베를 다시 풀어내며 기다림의 시간은 물화된다. 이 이야기는 이른바 ‘페넬로페의 베 짜기(The web of Penelope)’로 불린다. 한편 ‘쉴 새 없이 하는 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 비유는 사실상 어딘가에 집중해 지칠 줄 모르고 그 일을 이어나가는 누군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홀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한껏 몰두한 페넬로페, 실을 자아 패턴을 짓고 또 풀기를 반복하는 페넬로페, 그 시간 동안 온갖 감정 사이를 오가며 심리적 변화를 겪는 페넬로페, 애타게 기다리는 존재가 어서 자신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페넬로페…. 앞서 나열한 문장들에서 ‘페넬로페’의 이름을 덜어내고, 그 빈자리에 작업을 이어가는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들여앉혀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송다슬의 개인전 ≪WEB OF P≫는 바로 여기서부터 짜인다.
송다슬이 페넬로페 이야기를 작업으로 전개하며 보다 집중하는 부분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사이의 관계도가 아닌, 페넬로페라는 한 개인이 베를 짜고 또 푸는 작업 행위와 그에 맞물린 긴 시간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며, 페넬로페라는 인물 자체에 몰입해 그녀에 동화되어 작업을 해나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페넬로페가 겪는 낮과 밤의 지난하고 더디게 흐르는 시간과 사랑하는 자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베 짜기라는 능동적인 수행으로 치환하는 일은 예술과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나 마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페넬로페가 실타래를 풀고 엮어 베를 짜듯, 송다슬은 이미지를 짜고 푸는 식의 작업을 이어간다. 가상의 노이즈 이미지에 데이터 값을 더하고 빼며, 이 과정을 기록한 일련의 무빙 이미지가 탄생한다. 작업이 펼쳐지는 공간에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연속성을 지닌 타래 같은 이미지들이 흐르고 있다. 생성되는 순간 변이하는 패턴들, 윙윙대고 지글거리는 움직임을 가진 이미지들이 눈앞을 가득 메운다. 페넬로페로서, 이 인물에 동화된 작가와 그로부터 파생된 작업 방식은 한 발 더 나아가, 작업 그 자체로도 물리적으로 짜이는 동시에 헝클어지는 장면을 연출하며 페넬로페의 베 짜기로써 전시 공간에 현현한다.
타래 2. 그녀의 내면에서
페넬로페가 베를 짜고 또 푸는 일은 되는 일인 동시에 되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실을 짓는 자이자 짓지 않는 자, 짓기를 거부하는 자이자 짓기를 반복하는 자이다. 결혼 서약을 지키는 진실의 수호자인 동시에 속임수를 쓰는 책략가 어쩌면 사기꾼이기도 하다. 남편이 떠난 집에 온종일 머물기 때문에 수동적인 자로 보이지만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유혹에 쉬이 넘어가지 않고 유예의 방안을 짜는 능동적인 자이다. 페넬로페는 이 양극단을 오가는 존재,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상이한 두 상태를 유지하며 양발을 계속해서 바꿔 딛는 존재이다. 신화 속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이다. 말 안 되는 존재이고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 동시에 살고 세월을 유영하며 지낸다. 마치 엘렌 식수가 묘사한 무의식을 무한히 탐험하는 여성들처럼. [1]
한 가정에 귀속되어 소위 여성적이라 불리는 베 짜는 일로 남편의 계보(시아버지의 수의를 짓는 일)를 잇는 존재로 보이는 그녀의 내면에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져 왔을까? 혹시 그녀가 이 작업 행위에 희열을 느끼고 있지는 않나? 남편을 기다리는 용도에 불과한 베 짜기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작업은 아니었을까? 20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을 향한 순애보가 아니라 베 짜기와 페넬로페 사이에 뗄 수 없이 강력한 고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라면? 어쩌면 그녀에게 수십 년의 세월이 단 하루처럼 느껴졌다면? 만약 그녀의 감정과 내면을 이루는 단면을 추출해 이미지화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모양을 지녔을까? 지금 우리 눈앞에서 소리 없이 소리를 만드는, 진동 없이 진동을 일으키는, 서사 바깥에서 서사를 만드는, 선형의 시간 밖에서 회오리치는, 시작도 끝도 없이 웅성거리는 이 이미지들과 닮아 있지 않을까?
각주
[1] 여자의 무의식은 세계적이다. 마찬가지로 여자의 리비도는 우주적이다. (…) 결코 주변을 새기거나 구별함이 없이 타자들의 현기증나는 횡단, 그녀들, 그 남자들 안에서의 덧없는 그리고 열정적인 머묾을 강행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 그녀들, 그들을 그들이 일어나자마자 무의식에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보고, 충동에서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나서 좀 더 멀리서 그들을 사랑하는 시간 동안 그들 속에 산다. 그 짧은 동일화적인 포옹으로 흠뻑 적셔진 채 그녀는 간다. 그리고 무한으로 통한다. 오로지 그녀만이 안으로부터 알기를 감행한다. 안으로부터 알기를 원한다. 그녀는 추방된 자이기에 내면의 언어 이전의 울림에 끊임없이 귀 기울여 왔다. 그녀는 1천 개의 언어로 된 또 다른 언어를 말하게 한다. 그 언어는 벽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삶에 그녀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여자의 언어는 담고 있지 않는다. 품는다. 여자의 언어는 억제하지 않는다.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혼란스럽게 언술되는 곳, 다수일 수 있는 기적, 변화 가능성의 재능을 누리는 여자는 자기가 다수의 미지의 여인들임을 언뜻 감지해도, 그 미지의 여인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나는 노래하는 드넓은 육체이니. 그 육체 위에 그 누구도 모르는 나, 그러나 변모 중이기에 우선 살아 있는, 노래하는 드넓은 육신 위에 접목된다. (엘렌 식수, 박혜영(역), 『메두사의 웃음/출구』, 동문선,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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